2020년 2월 이후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하여 전 세계 교통 및 관광이 급감하고 세계 각국에서 아시아인 증오범죄는 급증하는 등 흑역사 쪽으로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침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저출산세대인 1999년 출생자들이 징병적령이 되어 입대하는 데 입대자들이 적어서 징병제만으로 병력충당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전에는 징병으로 현역군인 병력충당을 하고 남은 징병대상자들은 현역군인 아닌 상근예비역, 의무전투경찰순경, 사회복무요원 등 여러 대체복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징병대상자 급감으로 현역군인 충당도 매우 어려워서 이러한 대체복무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2021년이 되자 저출산으로 인한 징병대상자의 부족 및 불황으로 인한 고실업률의 지속으로 인하여 징병제폐지 후 모병제실시를 하자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202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징병제폐지를 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징병제와 관련해서 남자들은 안하고 여자들만 하는 출산 및 치마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여러 사항들을 비교하여 봅니다.
출산 및 치마를 남자들은 안하고 여자들만 하는 것의 최대 차이가 출산 = 神, 치마 = 사람이 그렇게 정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출산 및 징병의 비교와 여자의 바지착용에 대한 시대적변화
•출산 및 징병의 비교와 여자의 바지착용에 대한 시대적변화에 대한 개관
흔히 여자 = 출산, 남자 = 징병이 된다고 비교들을 하는 데 그러면 일본과 이스라엘에서는 이 사항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의문입니다.
첫째 일본에서 여자 = 출산, 남자 = 징병이 된다고 비교하는 사항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의문입니다.
일본은 대표적인 모병제국가로서 징병제를 안하는 것은 물론 일본 헌법에서도 일본 국민들의 병역의무를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본에서 남자들은 전혀 징병이 안되지만 여자들은 다른 나라의 여자들처럼 출산을 합니다.
일본여자들은 출산하면서 일본남자들은 징병이 안되는 것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의문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에서 여자 = 출산, 남자 = 징병이 된다고 비교하는 사항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의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대표적인 여성징병국가로서 남자들도 징병하여 남녀평등(?)국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징병되면서 역시 다른 나라의 여자들처럼 출산을 합니다.
이스라엘여자들은 이스라엘남자들처럼 징병되는 데 다른 나라의 남자들처럼 출산안하는 이스라엘남자들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의문입니다.
이러한 출산 및 징병과 관련해서 전자는 이미 대혁명을 이루고 대발언을 한 분이 계신데 후자는 그럴만한데도 없으므로 여기서 논하고자 합니다.
•출산거부에 대한 마거릿 생어의 대혁명 및 대발언
의학의 발달로 피임하는 것이 가능해진 이후에 법으로서 그 피임이 금지되어서 콘돔 등 피임용품의 시판이 금지되던 적이 있는 데 20세기 초반의 미국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의 마거릿 생어(1879년 9월 14일 ~ 1966년 9월 6일)가 피임의 합법화 및 대보급에 앞장서서 이루어냈습니다.
그녀는 11남매 중 여섯째로 출생하였는 데 다산과 빈곤으로 인하여 49세에 별세한 어머니를 보면서 이렇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미국에서 불법이던 피임을 보급하려다가 투옥된 적도 여러번이 있어서 옥고를 치르고 전과자가 되면서 세계 여성들을 위해서 이룬 대업적입니다.
그녀가 이와 관련해서 평생 입버릇 처럼 하던 발언이 "나의 어머니는 다산과 빈곤으로 인하여 40대까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아버지는 80대까지 긴 생애를 즐기면서 사셨다"였습니다.
이만큼 그녀는 세상이 생각하지도 못하던 자신은 물론 전 세계 여성들의 권리찾기가 평생을 기여하여서 이루어서 세계 인구의 절반에게 해당 혜택을 누리도록 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마거릿 생어는 교사, 간호사, 여성운동가, 범죄자로 모두 분류될수 있습니다.
첫째 교사로 분류될수 있는 마거릿 생어입니다.
마거릿 생어는 초등학교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 간호사로 분류될수 있는 마거릿 생어입니다.
마거릿 생어는 간호학교를 졸업후 보건간호사가 되어 빈민가에 간호하는 동안 빈곤과 다산이 모자(母子)의 사망률을 높인다는 것을 보고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확신하여 피임기구의 사용 등으로 산아제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셋째 여성운동가로 분류될수 있는 마거릿 생어입니다.
마거릿 생어는 산아제한을 널리 보급하여 여성운동가로 분류될수 있습니다.
넷째 범죄자로 분류될수 있는 마거릿 생어입니다.
마거릿 생어는 1914년 잡지 〈여성의 반란 The Woman Rebel〉(〈산아제한지(誌) Birth Control Review〉로 제목이 바뀜)을 발간했고, 팜플렛 〈가족계획 Family Limitation〉을 배포했다. 이에 산아제한을 옹호하는 자료를 우송한 죄로 기소되었으나 1916년 기각되었습니다.
1917년 브루클린에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 진료소를 열었으나 공적불법방해(公的不法妨害)를 계속한 죄로 고발되어 같은 해 30일 동안 감화원에 수감되었습니다.
1929년 생어 산아제한진료소가 검색당하여 서류를 압수당하기도 하였으나 의사·사회사업가 등의 지지자가 늘어나자 소송은 각하되었습니다.
따라서 마거릿 생어는 범죄자로도 분류될수 있습니다.
마거릿 생어는 여성운동가이지만 그렇게 해서 범죄를 하여 범죄자로도 분류될수 있는 데 여성운동가를 하기 전에 교사와 간호사를 하여 그쪽들로도 분류될수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와 관련된 징병의 세대차이
故 박정희 前 대통령(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이 징병적령(20세)에 해당하는 1937년 당시 한반도는 일본 영토였고 일본에서는 1873 ~ 1945년까지 징병제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한일합방 후 자국 영토가 된 한반도에서는 34년이 지난 1944년까지도 징병제를 하지 않아서 실제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징병제를 하던 시기는 1년 내외로 짧습니다.
마침 이 시기는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57기로 졸업 후 만주에서 만주군으로 복무하던 시기이기도 한데 그분은 병역을 의무 아닌 선택으로 하였고 또래 세대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흔히 일제시대는 한국역사상 최대의 흑역사로 여겨지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1944 ~ 1945년까지 1년을 제외하고 징병제가 없어서 행복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뭐 일제시대 당시 징병제가 한국역사상 최대의 흑역사로도 여기지만 실제로는 1년 남짓 한 짧은 역사에 불과한데 오히려 광복 이후 독립국 대한민국으로 지속해온 징병제의 역사가 압도적으로 깁니다.
故 박정희 前 대통령보다 일찍 출생한 세대들만 하여도 20대 시절 병역의무가 없어서 일찍 사회진출하던 것을 알수 있는 데 해당 세대들의 20대 시절 그것도 20대 초반 시절 행적을 보시면 아실수 없습니다.
가령 윤봉길(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의사님도 일본국민이었는 데 징병적령(20세)에 해당하는 1928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지 않으셨고 20대 초반 시절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활동, 독서회운동을 하시면서 교사생활도 하셨습니다.
후세대들은 신성한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그 나이대에 그렇게 보내시다가 아직도 그렇게 해야 할 연령이던 22세가 되는 해이던 1930년 당시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나서 독립운동을 하러 가십니다.
그러다가 1932년 4월 29일 당시 홍커우 공원에서 대거사를 하면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에 처형되면서 스스로 남긴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데로 되셔서 일찍 순국하시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보통사람들의 수명만큼 사셨다면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이 집권 후 후세대들에게 3년간 해야하는 병역의무가 가장 신성한 의무라면서 강요하던 것을 어떻게 여겼을지가 미지수인데 그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셔서 알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이나 윤봉길 의사님이나 이 세대들이 징병모면세대여서 부러워 할만도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아셔야 할 사실이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은 병역이 의무 아닌 선택인 세대로서 해당 선택을 하여 대통령까지 되어 출세해 놓고 후세대들에게는 병역이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공론화할만한 사항인데 그렇지 않고 있는 데 정말 공론화해도 크게 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2019년 이후 징병제폐지여론이 높은 데 실현되면 정말 이 사실은 大공론화해서 징병제시대 당시의 모순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독립운동가 김구께서 대통령을 하셨어도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얼마나 국민들에게 강요하셨을지가 미지수입니다.
*교복자율화세대들이 후세대 특히 10대 중후반 소녀들에게 길이길이 주게된 피해
•교복자율화세대들이 후세대 특히 10대 중후반 소녀들에게 길이길이 주게된 피해에 대한 개관
여자 = 출산, 남자 = 징병이 된다고 하는 데 그렇다면 남자는 착용할수 없고 여자만 착용할수 있는 치마는 얼마나 성차별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는 데 10대 중후반 여자들은 원래 이와 관련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수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바지입어도 당연하게 여기는 데 원래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던 바지도 한 프랑스의 여자 디자이너가 널리 보급해서 여자들의 아랫도리를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치마는 길이가 길었는 데 짧은 치마도 여자에게 바지착용을 하게 한 그 프랑스의 여자 디자이너가 널리 보급하여 여자들의 아랫도리에 대한 대혁명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3월 2일에 청소년기가 시작하는 여자들은 우울해 지는 날이고 종료되는 여자들은 행복한 날입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매년 3월 2일에 청소년기가 시작하는 여자들은 우울해 지는 날입니다.
이날 중학교에 입학하는 여자들은 추후 6년동안 불편한 교복치마를 거의 매일 착용해야 되어서 상당수가 우울해 하는 날입니다.
둘째 우리나라에서 매년 3월 2일에 청소년기가 종료되는 여자들은 행복한 날입니다.
이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여자들은 지난 6년동안 거의 매일 착용하던 불편한 교복치마의 착용에 종지부를 찍어서 상당수가 행복해 하는 날입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1983년부터 이러한 여중생과 여고생들의 불편이 자취를 감추었어야 했는 데 문제는 당시 이들이 이 불편이 사라진 역사가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교복자율화라는 해당 혜택을 누리던 세대들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 세대들이 교복자율화라는 해당 혜택을 자유 아닌 방종으로 남용하여 1990년 전후에 교복부활이 이루어지게 하여 후세대 특히 여중생과 여고생들에게 길이길이 피해를 주던 것입니다.
1983 ~ 1990년 전후까지 당시 시대에 맞게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만화, 영화, 드라마에서는 이들이 모두 교복착용 아닌 사복착용을 한다는 사실을 아실수 있는 데 당시 교복자율화시대여서 이들은 교복착용을 안하던 것입니다.
이들은 후세대에 길이길이 피해를 준 세대이지만 다른 세대들이 이 교복자율화의 혜택을 누렸어도 그들이 똑같은 문제를 발생시켜서 교복부활이 이루어지게 하여 후세대 특히 여중생과 여고생들에게 길이길이 피해를 주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당시 더 잘못되던 사항은 교복부활과 관련된 교육행정이었는 데 전국의 모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복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 교복자율화시대 당시 여중생 및 여고생들이 아랫도리가 편하던 사항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이 세대들이 후세대에 길이길이 준 피해를 살펴봅니다.
•여자의 바지착용에 대한 시대적변화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를 착용하던 것은 인류역사상 수천년동안 지켜져 왔습니다.
구세계 뿐 아니라 신세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를 착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가수 출신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1883년 8월 19일 ~ 1971년 1월 10일)이 이에 반기를 들어 여자도 바지를 착용하게 하여 20세기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자들도 바지를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코코 샤넬은 여자들을 치마착용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게 하여 여자들이 치마 아닌 바지를 일반적으로 착용하게 하여 여자들의 아랫도리가 편해지게 하였습니다.
코코 샤넬은 가수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이지만 매국노로도 분류될수 있습니다.
첫째 가수로 분류될수 있는 코코 샤넬입니다.
코코 샤넬은 가수로서 카바레에서 노래하며 코코라는 예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둘째 패션 디자이너로 분류될수 있는 코코 샤넬입니다.
코코 샤넬은 가수은퇴후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세계최초의 미니스커트와 여성용바지를 디자인하여 세계 전역에 보급하였습니다.
셋째 매국노로 분류될수 있는 코코 샤넬입니다.
코코 샤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 독일이 조국 프랑스를 침공하였을때 이에 협조하여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아랫도리가 편해지게 하던 코코 샤넬은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였는 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찌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점령됩니다.
이때 코코 샤넬은 나찌 독일에 협조하다가 나찌 독일이 패전 후 코코 샤넬은 매국노로 낙인찍혀서 종전 후 중립국 스위스로 망명하여 순탄치 않은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거나 당시 프랑스가 나찌 독일에 점령되지 않았다면 코코 샤넬은 그러한 악인이 될 일이 없었는 데 역시 사람이 선인이 될지 악인이 될지는 시대의 흐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교복자율화세대들이 치마와 관련해서 후세대들에 길이길이 준 피해
우리나라에서는 1983 ~ 1990년 전후까지 교복자율화시대로서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교복 아닌 사복을 착용하고 학교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혜택을 누리던 교복자율화세대들이 그 자유를 방종으로 남용하여 학생지도의 애로, 탈선의 증가, 학부모 등의 가계부담 등을 가져오게 됩니다.
첫째 교복자율화의 교복자율화세대들이 그 자유를 방종으로 남용하여 가져오던 학생지도의 애로였습니다.
이들이 교복 아닌 사복을 착용하고 학교에 다니자 중학생(특히 1학년 학생)을 국민학생(現 초등학교), 고등학생(특히 3학년 학생)을 성인과 구분할수 없어서 이들에 대하여 교외에서 특히 청소년지도시 애로가 발생합니다.
둘째 교복자율화의 교복자율화세대들이 그 자유를 방종으로 남용하여 가져오던 탈선의 증가였습니다.
당시 미성년자의 술과 담배의 구매 및 유흥업소 출입이 사실상 묵인되었는 데 교복착용을 안한 이들의 해당 탈선이 급증하였지만 고등학생(특히 3학년 학생)들은 성년자와 구분이 안되다시피 하여 이를 막기가 어려웠습니다.
셋째 교복자율화의 교복자율화세대들이 그 자유를 방종으로 남용하여 가져오던 학부모들의 가계부담였습니다.
이들이 사복착용하면서 학교에 착용하고 갈 각종 사복을 사달라고 부모님들에게 떼쓰는 일이 많아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 학부모들의 가계부담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문교부에서는 1986년 2학기부터 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교장 재량으로 다시 교복착용을 하게 하는 데 이것이 매우 잘못된 조치였습니다.
학교장의 재량에 맡길 것이 아니라 1983년 1학기부터 전국의 모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복자율화를 하였듯 1986년 2학기부터 전국의 모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복부활을 했어야 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서 1980년대 후반까지는 대부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복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아 막상 이 문제를 일으킨 교복자율화세대들은 교복착용을 잠시도 안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오히려 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교복부활세대들은 엉뚱하게도 전세대인 교복자율화세대로 인하여 교복부활의 불이익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1990년대 초반 당시 특히 중학생들의 이에 대한 불평불만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교복자율화세대들이 일으키던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1986년 2학기부터 전국의 모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복부활을 하도록 하지 않고 학교장의 재량에 맡기던 문교부의 교육행정도 문제이던 것입니다.
교복자율화시대 당시 여자들은 치마착용율이 높아서 노파들도 긴 치마착용을 많이 하였고 작업복, 청소복, 환자복, 죄수복을 제외한 여자제복은 거의 다 치마였는 데 다.지금은 바지로 착용하는 여자들의 간호복과 경찰복도 치마였습니다.
그러다가 21세기 이후 시대가 바뀌어 지금 여자들은 치마보다 바지를 많이 착용하는 데 여중생과 여고생들에게 치마교복착용은 상당수가 싫은 일입니다.
1982년 이전 여자교복도 치마였는 데 1983년이 되어 교복자율화되자 여중생과 여고생들은 치마착용보다 바지착용을 많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이 방과 후 사복바지 착용하고 분식집에 군것질하러 갔을때 해당 분식집 여사장님이나 여종업원들이나 대부분 치마착용을 하였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을때 해당 병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나 모두 치마간호복을 착용하였는 데 당시에는 바지간호복이 없을때 입니다.
그러다가 21세기 들어 정반대가 되어 여중생이나 여고생들이 방과 후 교복치마 착용하고 분식집에 군것질하러 갔을때 해당 분식집 여사장님이나 여종업원들이나 대부분 바지착용을 하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을때 해당 병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나 모두 바지간호복을 착용합니다.
교복자율화세대들이 지들한테 주어지던 교복자율화의 자유를 방종으로 남용하지 않았다면 교복부활은 존재하지 않아서 2021년까지도 이들처럼 여중생과 여고생들이 불편한 교복치마 아닌 편한 사복바지착용하고 학교다니는 혜택을 누릴수 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 교복자율화세대들이 후세대 특히 여중생과 여고생들에게 길이길이 주고 있는 피해는 이들이 대부분 사망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공론화하고 넘어가야할 문제입니다.
교복부활조치를 잘못하던 문교부장관도 이미 고령으로 사망하였는 데 지가 문교부장관을 할때 무엇을 잘못 했는 지 모르고 죽은 것 자체가 그가 알길이 없어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병역의무를 여성 아닌 남성에게만 부과하는 법조항
대한민국헌법
제39조
①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②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병역법
제3조(병역의무)
①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은 「대한민국헌법」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여성은 지원에 의하여 현역 및 예비역으로만 복무할 수 있다. <개정 2011. 5. 24., 2019. 12. 31.>
② 이 법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병역의무에 대한 특례(特例)를 규정할 수 없다.
③ 제1항에 따른 병역의무 및 지원은 인종, 피부색 등을 이유로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④ 병역의무자로서 6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의 형(刑)을 선고받은 사람은 병역에 복무할 수 없으며 병적(兵籍)에서 제적된다. <개정 2013. 6. 4.>
[전문개정 2009. 6. 9.]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의 교복에 대하여 규정한 법조항
초ㆍ중등교육법
제8조(학교 규칙)
① 학교의 장(학교를 설립하는 경우에는 그 학교를 설립하려는 자를 말한다)은 법령의 범위에서 학교 규칙(이하 "학칙"이라 한다)을 제정 또는 개정할 수 있다.
② 학칙의 기재 사항과 제정ㆍ개정 절차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2012.3.21]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학교규칙의 기재사항 등)
①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한 학교의 학교규칙(이하 "학칙"이라 한다)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기재하여야 한다. <개정 2005.1.29., 2011.3.18., 2012.4.20., 2012.10.29.>
1. 수업연한·학년·학기 및 휴업일
2. 학급편제 및 학생정원
3. 교과·수업일수 및 고사와 과정수료의 인정
4. 입학·재입학·편입학·전학·휴학·퇴학·수료 및 졸업
5. 조기진급, 조기졸업 및 상급학교 조기입학 자격 부여
6. 수업료·입학금 기타의 비용징수
7. 학생 포상, 징계, 징계 외의 지도방법, 두발·복장 등 용모, 교육목적상 필요한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 및 학교 내 교육·연구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
8. 학생자치활동의 조직 및 운영
9. 학칙개정절차
10. 기타 법령에서 정하는 사항
② 삭제 <2005.1.29.>
③ 다음 각 호의 학교·학과·과정 또는 시설을 설치·운영하는 학교의 학칙에는 제1항 각 호의 사항 외에 각각 그 설치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여야 한다. <개정 2013.2.15.>
1. 법 제5조에 따른 병설학교
2. 법 제43조의2에 따른 방송통신중학교 또는 법 제51조에 따른 방송통신고등학교
3. 법 제48조에 따른 학과
4. 법 제49조에 따른 시간제 또는 통신제 과정
5. 기숙사
④ 학교의 장은 제1항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신설 2011.3.18., 2012.4.20., 2013.2.15.>
[제목개정 2011.3.18.]
모병제는 모래성인가
이오성 기자 입력 2021.05.10. 10:40
정치권과 여론은 물론 군까지 모병제를 말하고 있다. '징병제냐 모병제냐'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군이라는 나무를 보지 못한다. 적정 군 병력에 대한 논의를 뺀 모병제는 모래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에 걸린 육군간부 모집 광고판. ⓒ시사IN 조남진
대한민국은 징병제 국가인가, 모병제 국가인가. 너무 당연한 질문이어서 이상한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모병제란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만 자원해서 병사가 되는 제도다. 그 반대가 한국처럼 강제로 군대에 보내는 징병제다. 그러나 한국의 군사제도에도 모병제적 요소가 있다.
한국의 전체 병력 55만명 가운데 1만2600명이 병역의무가 없는데도 자원입대한 여성이다. 장교와 부사관(병사와 장교 사이의 중간 간부)으로 이루어진 여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반 병사 가운데서도 의무복무 기간을 마친 뒤 직업군인에 준하는 급료를 받는 임기제 부사관(옛 유급지원병, 하사)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근무한 뒤 자기 의사에 따라 하사로 연장 근무할 수 있다. 임기제부사관 제도는 복무 기간 단축으로, 숙달된 병사들이 일찍 빠져나가면서 병력 공백을 막기 위해 2008년 도입됐다. 이처럼 큰 틀의 징병제 밑엔 스스로 병사의 길을 선택한 직업군인들이 존재한다. 이 시스템을 딱 잘라서 징병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미국이 모병제 국가일까
미국은 대표적인 모병제 국가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정예화된 소규모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1973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미국은 모병제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18~25세 이상의 모든 미국인 남성은 ‘SSS(Selective Service System)’라는 시스템에 등록해야 하고 유사시에 징병이 가능하다. 1917년부터 시행된 ‘SSS’는 ‘의무 징병 등록제’ 또는 ‘선발 징병 시스템’으로 해석되는데 중요한 점은 ‘강제’다. SSS를 따르지 않으면 학자금 대출, 취업, 공직 진출 기회 등에서 여러 불이익을 당한다. 2020년 초 미국과 이란의 전면전 가능성이 커지자 전쟁 공포에 빠진 미국 청년들의 징집 문의가 쇄도하면서 SSS 웹사이트가 마비되기도 했다. 이런 미국을 딱 잘라 모병제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징병제를 폐지한 프랑스는 2019년부터 남녀 청소년에게 한 달간 군사교육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모병제는 개인이 강제로 군인이 되지 않는 제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병제 아래에서 민간인은 강제로 총을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타이완, 프랑스처럼 모병제를 시행하는 나라에서도 몇 개월씩 군사훈련을 받는다. 최근 모병제 논의에 불을 지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남녀 모두 최대 100일 정도 기초군사훈련을 받자고 제안했다. 유사시 후방 안전을 책임질 예비군 양성 때문이다. 모병제가 되더라도 축구계의 월드 스타 손흥민이 군사훈련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민간인이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 체제를 모병제라 불러도 괜찮은 것일까.
‘모병제냐 징병제냐’는 일도양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병제가 자원한 사람만 총을 들게 하는 제도도 아니다. 징병제 아래에서도 여러 대체복무 제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20년 전 징병제를 폐지했지만 2018년 마크롱 정부가 모든 청년 남녀로 하여금 매년 한 달간 기초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징병제 일부 부활 정책을 추진했다. 단, 사격 등 살상훈련은 제외했다. 다양한 인종끼리 합숙 생활을 통해 공동체 통합을 꾀하는 것이 군사훈련의 목적이었다. 이 제도는 논란 끝에 이듬해 16세 남녀 청소년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군사교육 체험, 소방훈련 등으로 수정됐다. 이처럼 나라마다 형편에 맞게 징병과 모병을 넘나들며 다종다양하게 제도를 변주해왔다.
과거 모병제와 징병제는 진보-보수 사이의 대립각이 뚜렷한 이념 이슈로 여겨졌다. 대체로 강제징집에 비판적인 진보 진영에서는 모병제를,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군사력 확보를 중시하는 보수는 징병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구도는 사실 허상에 가까웠다. 1980년대 말부터 군대 내 인권, 열악한 처우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현행 징병제의 대안으로 막연하게 모병제가 거론된 것에 불과했다. 당시 모병제 담론은 ‘강제징병 반대 대 신성한 국방의 의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대립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만원씨 같은 보수 논객과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이 모병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념이 아니라 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출산율 감소로 인한 인구절벽으로 군 병력이 급속히 줄어들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징병제(양)로 국방력 유지가 어려워졌으니 모병제(질)로 전환하자는 주장이었다. 2000년대 초반 군 가산점 논란 이후 남녀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모병제는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민주당 계열 정당과 진보정당에서도 각종 모병제·징병제 혼합형 모델이 거론되었다.
모병제가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어선 지는 오래됐다. 최근 박용진 의원의 제안 이전에도 정치권의 논의는 진영을 넘나들었다. 2012년 대선 경선에 나섰던 김두관 후보(현재 여권), 2016년 남경필 경기도지사(현재 야권)가 모병제의 필요성을 밝혔다.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을 지낸 이주호 전 장관도 모병제론자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17년 대선 경선 당시 전문 병사 10만명을 모집하자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9년,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모병제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해 ‘모병제가 민주당의 당론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모병제를 주장하는 정치인들. 왼쪽부터 박용진 의원,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 김두관 의원. ⓒ시사IN 조남진(왼쪽)·이명익(가운데)·윤무영
북한과 맞설 군사력 유지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 몇 년 사이 육군사관학교 등 군 내부에서도 모병제 전환을 검토하는 연구논문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논문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역시 인구절벽을 맞아 모병제 도입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치권과 여론은 물론 군까지 모병제를 말하는 시간이다. 모병제는 이미 ‘다가온 미래’처럼 보인다.
2020년 10월 KBS 〈시사기획 창〉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61.5%가 모병제에 찬성했다. 반대(28.8%)보다 2배 이상 높았다. 30·40대, 그리고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인 경우 찬성 비율이 높았다. 모병제 찬성 이유로는 전문성을 높여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답변이 32.9%로 가장 많았고, 인구감소에 대비한 병력 구조 개편의 필요성(21.8%)은 그다음이었다.
이 모든 논의에는 대전제가 있다. 군 병력을 지금처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2020 국방백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군인 수는 장교와 부사관 및 사병을 포함해 55만5000명이다. 전체 인구 대비 1.1% 수준이다. 그런데 이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다. 대다수 국가의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은 0.3~0.8% 정도다. 1%를 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왜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휴전선을 맞대고 북한이 있다. 북한은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이 4%를 넘는다. 세계 1위다. 북한은 남녀 모두 군대에 간다. 최근 국정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남자는 7~8년, 여자는 5년간 복무한다. 실제 군사훈련에 투입되는 기간은 훨씬 짧고, 준민간인 신분으로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고 알려졌으나 어찌 됐든 한국 처지에선 위협적이다. 북한과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유지(군사력의 대칭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그 결과 한국 군대의 징집률은 계속 높아져 최근엔 약 90%다. 남성 10명 중 9명이 현역 판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국가의 징집률 40~50%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 병영국가인 이스라엘보다 높다. 여성 징병을 요구한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징집률이 거론된다. 청원인은 “줄어드는 출산율로 남성의 징집률이 9할에 육박하고 있다”라며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북한의 존재는 물론 위협적이다. 그러나 현행 군 병력을 유지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70년 전 한국전쟁 때와 비교해 남북 간의 전력은 전쟁 양상, 국방비 지출, 첨단무기 규모 등을 감안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미국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러시아·중국 등에 이어 군사력 세계 6위다. 북한은 28위다. 이라크 전쟁 때와 달리 한국은 산악지형이 많아서 보병이 많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불충분하다. 그래서 군 병력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말인가.

미국은 대표적인 모병제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유사시 징병이 가능하다. 위는 지난해 1월 미국 포트그래브 기지에서 이라크행 수송기에 탑승하는 미군들.ⓒAFP PHOTO
적정 군 병력이 얼마인지 우리 사회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부터 30만~4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파편적 논의로 그쳤다. 문제는 방향이다. 병력 축소든 유지든, 어떤 목표와 방향에 맞춰 군 병력을 정할지 컨센서스가 형성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군 인권 관련 활동을 해온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현재 공군이나 해군의 경우 병사의 필요성이 ‘제로’에 가깝다. 육군도 첨단 기계화로 소총수의 역할이 사라지고 있다. 병사가 필요하지 않은데 왜 모병제를 해야 하느냐”라고 말했다. 상시 전투 준비는 부사관·장교 등 직업군인에게 맡기고 기초군사훈련으로 양성한 예비군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면 된다는 것이 오창익 사무국장의 생각이다.
징병제 전문가인 백승덕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적정 군 병력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징집을 담당하는 병무청 관계자조차 동상이몽이다. 어떤 이는 북한을, 어떤 이는 중국을 적국으로 놓고 병력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을 잠재적 적국으로 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안보 목표 아래 어느 정도 군인이 필요한지 생각이 다르다.”
적정 군 병력에 대한 논의를 뺀 모병제는 모래성이다. 장교·부사관 대 병사의 비율, 육군 장군 숫자가 미군보다 많을 정도로 기형적인 군 조직 문제, 예비군 편제 등 하나하나가 모병제와 연관된 계획 수립 없이는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들이다.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군인연금도 걸림돌이다. 모병제 아래 들어온 병사들이 기존 군인연금에 편입될 수 있을까? 골치 아픈 사회적 논란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까 여론은 어느 부위를 어떻게 수술할지 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군대를 모병제라는 수술대 위에 올리려 하는 셈이다. 그 와중에 국방부는 현재 55만명인 군인을 2022년까지 50만명으로 줄이겠다고 올해 초 업무보고에서 밝혔다. 급한 대로 숫자부터 줄이는 판국이다.
껍데기만 남은 논의는 결국 돈 문제로 흘러간다. “얼마 주면 군대 갈래?”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앞선 〈시사기획 창〉 여론조사에서 모병제 아래에서 적정한 월급이 얼마인지 물은 결과 41.6%가 200만원 미만, 39.3%는 250만원 미만이라고 답했다. 반면 박용진 의원은 대기업 초봉 수준의 급여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국회예산정책처는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 의뢰로 ‘모병제 전환에 따른 관련 비용 전망 분석’ 보고서를 작성했다. 현행 부사관 급여(하사 1호봉)의 90%를 지급하고, 약 30만명인 병사(장교와 부사관 제외)를 절반으로 줄여 15만명을 모집할 경우 5년간 6조원이 더 드는 것으로 추계했다. 비용에 대한 접근으로는 이 정도가 가장 나아간 내용이다. 차라리 간부가 되고 말지, 간부보다 적은 급여를 받고 부하로 복무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다.

2018년 1월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풍경. 입영 장병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점점 떨어지는 병사 충원율
이런 현실은 결국 모병제가 ‘빈민의 군대’를 양성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모병제 자체를 두고 벌이는 논쟁 가운데 가장 뜨겁다. 나경원·유승민 같은 보수 정치인과 일부 시민사회 운동가들은 ‘군인=가난한 집 자식’이라는 낙인찍기가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반면 국방 문제 전문가인 김종대 전 의원은 가난한 집 청년이 군대를 통해서 디딤돌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왜 나쁘냐고 반박한다.
분명한 흐름은 세계적으로 모병제 국가의 병사 충원율이 점점 떨어진다는 점이다. 일본 자위대의 병사 충원율은 75% 수준이고, 2011년 징병제를 폐지한 독일은 병력난에 시달리다가 유럽연합(EU) 시민이면 누구나 독일군이 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2018년 징병제를 폐지한 타이완도 벌써 병력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최근 모병제 전환한 타이완의 상황은? 기사 참조). 한국도 마찬가지다. 모병제 도입 여부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는 임기제 부사관 충원율이 50%를 밑돈다. 처우 때문인지 군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청년들이 군인을 매력적인 직업으로 여기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모병제는 군대를 다루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구절벽 시대의 유일한 해법이 아니며, 올바른 해법인지에 대해서도 의문 부호가 남는다. 군사력 세계 6위, 국방비 규모 세계 8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징병제냐 모병제냐’라는 이분법적 토론으로는 군이라는 나무를 보지 못한다. 군을 둘러싼 숱한 과제가 해일처럼 밀려오는데 한국인들은 모병제라는 모래성만 쌓고 있는 게 아닐까.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19
최근 모병제 전환한 타이완의 상황은?
이오성 기자 입력 2021.05.10. 10:39

2013년 7월 군기교육을 받다 사망한 군인 훙중추의 초상화를 든 시민들이 타이완 타이베이에 모였다. ⓒAP Photo
타이완은 우리와 닮았다. 군사 강대국 중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으며, 징병제를 통해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다. 인구는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중국 본토 수복’을 기치로 1950년대에는 군인 60만명, 1990년대에도 40만명을 징병제로 유지했다.
타이완은 2000년 이후 단계적으로 모병제를 도입해 2018년 12월부터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 사례라는 점에서 모병제 논의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가다. 모병제라고 해도 일반 남성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94년 이후 출생한 남성은 4개월 군사훈련을 수료해야 병역의무를 마치고 예비군이 된다.
모병제 논의는 2008년 집권한 마잉주 총통의 대선 공약에서 시작했다. 당시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며 ‘양안 경제협력 기본협정’이 체결되는 등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전례 없는 우호 기류가 조성됐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단순한 정치·외교적 압박으로 인식하면서 모병제 추진이 급물살을 탔다. 군의 규모를 축소해 남은 예산을 다른 분야에 쓰겠다는 계획도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절벽 문제도 있었다.
징병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타이완 군대도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인권유린 사고가 잦았고, 군 내 자살이 잇따라 사회문제가 됐다. 병역기피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2013년에는 제대를 3일 앞둔 군인이 휴대전화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군기교육을 받다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타이베이시에 10만명 넘는 시민이 모여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징병제 폐지 여론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
모병제 전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징병제 폐지 여론이 곧 모병제에 대한 지지로 바뀐 건 아니었다. 군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오히려 모병에 애를 먹었다. 2013년 병력 모집 2만8000명을 목표로 했지만, 지원자는 8000명에 그쳤다. 2014년 병사 급여를 성인 소득 평균치 이상으로 올린 뒤에야 1만5000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타이완은 모병제 성공을 위해 국방예산을 대폭 늘려야 했다. 당초 2015년을 목표로 했던 모병제는 2018년 말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지금 타이완 모병제는 흔들리는 중이다. 병력 부족 문제와 함께 타이완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 총통이 2016년 집권하면서 양안관계가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타이완 침공 시나리오를 거론한다. 이처럼 양안 간 군사적 긴장이 커지면서 징병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타이완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던진다. 모병제 전환은 신중에 신중을 더한 사회적 토론 끝에 이루어져야 한다. 군이 스스로 변화해서 군인의 길을 자랑스럽게 여기게끔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병제가 인구절벽 시대 군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참고 자료:‘한국군의 모병제 전환 가능성 모색’(〈한국군사학논집〉, 2018), 〈세계 5대 군사강소국과 한국의 자주국방〉(김재엽, 선학사, 2020)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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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할 권리, 인간 해방을 위하여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기사입력 2020-02-19 15:46
19세기에 접어들어 미국은 격동의 시기를 맞았다. 1837년에는 대학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입학허가를 내주었고, 1861~1865년에는 남북전쟁으로 흑인노예제도가 무너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여성에게 결혼과 성적 자유는 별개’라는 인식과 ‘자유로운 사랑’의 개념이 생겨났다. 여성의 성행위와 출산이 별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남녀의 지적 동등권과 여성의 투표권, 성을 즐길 자유와 이혼할 자유 등 여성들의 권리가 대두되던 시기였다.
피임 역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인물은 미국의 여성 사회운동가 ‘마거릿 생어’다. 그녀는 굶주림을 피해 미국에 온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 출신이었고, 11명의 자녀들 중 여섯째였다. 거듭되는 임신과 출산, 육아로 지친 생어의 어머니는 40대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생어의 나이는 16세였다. 생어가 살던 환경은 진보적인 편이었다. 생어의 아버지는 미국의 정치가 헨리 조지의 친구였고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생어의 남편은 건축가로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시대 미국에는 앤서니 콤스톡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보수 사상가였던 그는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1873년 피임에 관한 정보와 광고를 음란물로 규정하는 법률을 미국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일반적인 성교육으로서의 피임에 대한 내용까지 모두 음란물이라 했고, 의사들은 진료 때에도 피임에 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40여 년 동안 시행된 미국의 반음란법, 일명 ‘콤스톡법’이다. 이 법률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됐으며, 콤스톡이 일일이 찾아내 고발한 수천 명의 사람은 약사·의사·콘돔판매원 등 다양했다. 그의 고발은 대중을 겁먹게 했고, 이 시기에 생어가 등장했다.
생어는 1911년 뉴욕으로 이사와 빈민가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잦은 출산 그리고 빈곤이 여성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사망률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생어가 피임운동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피임법이 다양하지 못했는데, 그는 여성의 의지하에 통제할 수 있는 ‘페서리’를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법으로 꼽았다. 생어는 이 피임법을 잡지에 소개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 여성의 성 문제를 고민하던 마리 스톱스를 만나게 된다.
생어와 스톱스는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고 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 미국 최초의 피임 클리닉을 열었다. 두 사람은 클리닉에서 스펀지와 페서리를 비롯한 피임법을 개발해 가르쳤고, 순회강연과 법정 대결을 통해 산아제한과 법 개정, 여성 인권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생어는 그레고리 핀커스를 만나 피임약 연구를 권유했고, 그 결과 1960년 경구 피임약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생어는 “산아제한은 본질적으로 여성교육”이라며 “피임은 여성이 자유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평등을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이는 모두 인간해방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리 스톱스의 이름을 딴 재단에서는 지금도 제3세계 여성들의 피임과 낙태, 출산을 포함한 여성 건강과 보건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김선형은 누구?
간호학을 전공하고 임상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여성들, 특히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다양한 삶의 고충을 마주하면서 여성을 병들게 하는 것, 여성의 건강이 그들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여성 건강과 인권에 관한 주제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김선형(건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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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여왕 '코코샤넬'이 나치 스파이?
기사입력 2011-08-17 15:27 최종수정 2011-08-17 16:03
[머니투데이 정윤희 인턴기자]
| 샤넬자서전 |
요원번호 F-7124, 암호명 '웨스트민스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대표 패션 디자이너 코코샤넬이 스파이 활동을 펼쳤다는 의혹에 대한 증거다.
당시 촉망받던 디자이너 샤넬은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져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샤넬은 과연 나치의 스파이였을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한 여자에 불과했을까.
| '적과의 동침: 코코샤넬의 비밀 전쟁' 표지 |
16일(현지시간) 미국 언론인 '할 번'이 출간한 샤넬의 전기 '적과의 동침: 코코 샤넬의 비밀 전쟁'에서는 샤넬의 나치 스파이 의혹과 관련해 요원번호와 암호명을 공개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스파이 의혹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자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은 충격에 빠졌다. 오늘날 모든 여성이 사랑하는 명품 브랜드 샤넬, 새삼 그녀의 생전의 패션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샤넬컬렉션 |
당당한 여성의 표본이었던 샤넬은 무엇보다 편안하고 실용적인 패션을 추구했다. 당시 여성들은 치마를 입고 말을 타야했는데, 과감하게 바지를 입고 말에 올라탄 샤넬의 그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다.
또 당시 상류층은 천연 보석만을 액세서리로 썼지만 샤넬은 인조 진주로 만든 목걸이를 걸쳤다. 지금의 명품 브랜드 샤넬은 '고전'이지만 당시 그녀의 패션은 언제나 주어진 틀을 깨는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샤넬은 생전 자신이 나치를 위해 일했다는 끊임없는 소문에 대해 전면 부인했으며 1971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는 미래의 일부가 되길 원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샤넬의 인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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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인턴기자 foryou3908@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1081714185407661&outlink=1&ref=https%3A%2F%2Fnews.naver.com
끝까지 말 안 듣던 여호와의 증인을 때려잡다
기사입력 2013-03-01 21:16
[한겨레]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1>조국‘군대화’의 그늘(상)
병역기피 일소로 입영률 99.9%
이것은 한편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방위와 전경이 만들어졌고
그래도 사람이 남아돌자
산업특례요원을 만들었다
군인 출신 박정희 정권에서
병역기피자는 ‘비국민’이었고
특권층 자식들은 특혜가 아니라
특별관리의 대상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 갈 때까지
감옥에서 또 감옥으로 갔다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조국근대화’의 기수라 하지만,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주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8년에서도 후반기인 유신 시절은 군대도 비상이 걸린 군대였다. 역사에서 보면 군대는 꼭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권력자들은 국방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징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 적합한 인간형을 육성해내는 교육장으로 군대를 이용했다. 한창 전쟁을 치를 때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유지해온 한국도 그런 경우였다.
‘단 한명의 열외’도 없는 병영국가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병역기피자 수를 보면 그 규모가 전체 징병 대상자의 15~20%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직 국가의 행정 능력이 개개인을 철저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데다가, 분단과 전쟁으로 호적 등 병사서류가 완비되지 않았던 탓에 매년 수만에서 십수만명의 병역기피자가 나왔던 것이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의 자수를 받았는데 1, 2차에 걸쳐 자진신고한 병역기피자가 무려 40만을 넘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은 1962년 병역법 개정을 통해 지방의 병무청을 신설하고 병무행정의 책임자를 국방장관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병무행정이란 민간인을 소집하여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현역입대 후에는 국방부가 관리하지만, 민간인 신분일 때는 내무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대만의 경우도 한국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역정사는 국방부 소속이 아니라 내정부 소속이다. 지방병무청이 만들어지고 병무행정이 국방장관 책임으로 일원화되면서 지방병무청장은 병무행정에 관한 한 지방행정부서와 경찰관서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갖게 된 것이다. 1968년 이북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병영국가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병무행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1968년에 도입된 주민등록증은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한 철저한 감시체제의 확립을 상징했다. 박정희는 “부정과 불신으로 얼룩진 병무행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1970년 8월 국방부 병무국을 해체하고 국방부의 외청으로 중앙에도 병무청을 창설했다.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정희는 이듬해 2월 중앙병무사범 방지대책위원회를 열어 국가비상사태에서의 강력한 병역기피자 단속방침을 밝혔다. 그럼에도 병역비리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집권당인 공화당 의장 백남억, 산업은행 총재 김민호 등 병역비리 연루자들을 사직시키고, 장성급 10여명을 구속했으며, 병무청장 전부일을 해임한 뒤 자신의 육사 동기인 김재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기존의 병역법이나 형법에 비해 처벌 규정을 강화한 것이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었다. 입영 및 소집 기피자는 기존의 병역법으로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나, 새 법으로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유신정권이 병역기피 일소 방침을 강력히 밀고 나가고, 또 이 무렵부터 행정의 전산화가 급속히 진전된데다가, 정전 이후 남쪽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징집연령에 도달하면서부터 병역기피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병무청에 따르면 1970년 13.2%에 달하던 병역기피율은 1973년 3월 특별조치법 발효 이후 0.3%로 급감했으며, 1974년에는 0.1%가 되었다. 5·16 직후의 병역기피자 수가 40만을 넘었던 것에 비한다면 10여년 뒤 병역기피자가 0.1% 이하인 200여명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병역기피가 근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단 한 명의 열외’도 없는 총화단결을 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공무원들을 달달 볶았다. 병역기피자가 발생할 때에는 “지방병무청과 구·시·군·읍·면·동에 있어서는 기피자 색출 책임자를 지정하고 철저한 색출 고발과 고발지연 또는 누락이 있을 때에는 관계 직원을 엄중 문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검찰 및 경찰서 단위로 병무사범 전담 검사 및 경찰관을 지명하고 각 경찰서 단위로 색출책임을 부여하여 그 검거 실적을 지검 검사에게 보고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붉은 페인트로 쓴 ‘기피자의 집’
병무사범단속 전담반의 활동 실적을 살펴보면 1974년 6월1일부터 7월15일까지 한달 반 동안 단속반은 관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업소 1만2584개를 조사하여 병역기피자를 고용한 6개 업소의 허가를 취소했고, “6284곳의 직장에서 539명의 병역기피자를 색출, 17개 업체는 병역기피자 고용 금지 위반 혐의로 사직 당국에 고발”했다. 이때 고발된 업체는 국제화학, 대성연탄 등 재벌급 대기업에서부터 동네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망라되었다고 한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기피자 539명을 색출하기 위해 1만2500여개의 관허업소와 6200여개의 직장을 뒤졌다 하니 이에 동원된 조사관의 수와 쓰여진 경비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고 꼬집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단속이 이루어진 시점은 바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사법원에서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서슬 푸른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직후였다. 유신체제는 병역기피자 단속을 명목으로 개개인에 대한 검문검색과 직장과 마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사회기강 확립’을, 다시 말해서 사회를 길들여갔다.
한 가지 흥미있는 점은 당시 박정희는 사회 저명인사나 특권층, 부유층의 자식들에 대해서 열외를 인정하지 않고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1973년 병무당국은 “일반국민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는 사회 저명인사 특권 및 부유층 인사들의 자제 942명과 연예인 및 체육인 708명을 선정”하여 특수병역관리 대상자로 삼고 명단을 관리했다. 중앙정보부는 특수병역관리 대상자의 친권자에 대해 배경을 조사하여 이를 각 부처에 통보했다. 박정희는 이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결재란에 자필로 “착안이 양호함”이라고 써 넣었다. 병무청은 이듬해인 1974년도에도 특수병역관리 대상자 1288명 전원에 대하여 현역입영 577명, 방위소집 201명, 징병검사 510명 등 병역의무 이행을 감독했고, 1975년에도 특수병역 관리대상자 2708명에 대한 명부를 작성했다.
이렇다 보니 유신시대에는 고위공직자나 재벌, 언론사 사주, 국회의원 등 상류층 자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특’이라는 도장이 찍혀 별도의 관리를 받았다. 박정희의 특별한 관심사이다 보니 ‘특’자가 찍힌 사람들도 머리 깎고 군대에 가야 했다. 박정희의 감시는 딱 거기까지였다. 일단 군대에 입대한 뒤 의병제대나 의가사제대를 하거나 ‘빵실’한 보직으로 빠지는 것은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특권층 자식들에 대한 특별관리에 대해 특권을 가진 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권을 가진 자들은 자기 자식들에 대한 특별관리가 역차별이라고 주장하여 마침내 1996년 국방부로 하여금 특수층 자제에 대한 특별관리를 폐지하게 만들었다.
특권층 자식들조차 예외 없이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병무당국은 평범한 집 자식들이 병역기피를 할 경우 그들의 인권을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았다. 한 예로 충남 홍성군 광천읍의 병사담당 직원은 어느 병역기피자의 집에 가로 30㎝ 세로 1m40㎝ 크기의 나무판에 흰색 바탕에 붉은 페인트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써 붙였다. 그 집 아들이 10년 전 17살 때 돈 번다고 가출한 죄였다.
이렇게 열심히 병역기피자를 없앤 것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상당한 비율의 병역기피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징병제도가 운영되다가 갑자기 병역기피자가 일소되었다는 것은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은 방위제도를 만들고 전투경찰을 만들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소집된 청년들을 정권유지를 위해 써먹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업에 배치되어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산업특례요원들이었다. 기업이 자격을 취소하면 당장 현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산업특례요원은 군대라는 목줄로 죄어 맨 현대판 노예노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는 자본에 이렇게 베풀 줄 알았다.
박정희가 한 사람의 열외도 없는 강력한 병영국가 건설을 꿈꿀 때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 것은 감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비국민’으로 몰려 옥에 갇혔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박정희 체제하에서 또다시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병역기피자 일소를 외치는 박정희의 뜻에 맞추어 병무청은 1974년을 ‘병역기피자 일소의 해’로 정하였다. 병무청의 방침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한 예로 병무청은 1974년 7월 “올 들어 발생한 병역기피자는 모두 78명으로 이 중엔 종교적 양심을 빙자하여 병역을 기피한 여호와의 증인이 87.2%인 68명”이라고 발표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 아니면 병역기피율은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74년 병무청의 단속실적을 보고받으면서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병무청은 1974년 12월12일부터 1975년 1월11일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대표 210명과 입영 간담회를 개최한 결과, 증인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그릇된 소행’임을 인정하고 병역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정은 어디까지나 성서에 입각하여 개인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병무당국으로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무청의 설득에 따라 병역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기로 했다고 청와대에 허위 보고를 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중에서 다수의 병역기피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 대한 병무당국의 불법적인 연행과 강제입영이었다.
의대생 정춘국은 왜 7년10개월을 복역했나
1975년 3월9일, 부산지검 검사 박철언이 이끄는 부산시 병무사범단속반은 가야왕국회관 등 19개의 여호와의 증인 집회소를 급습하여 예배중인 청년 63명을 구타하는 등 강제연행했다. 평화적인 종교행사를 치르고 있는 신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연행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었다. 병무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종교집회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집까지 찾아가 영장 없이 불법연행하거나 병무소집에 불응하면 여동생을 잡아가 고문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병무청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종교행사까지 습격하는 등 가혹하게 나선 것은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했다.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더이상 영장이 발부되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조치법은 병역거부자들이 실형을 살고 나와도 또다시 영장을 발부하여 몇번이고 반복해서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대생이었던 정춘국이 4차례에 걸쳐 7년10개월을 복역한 것도 특별조치법 ‘덕분’이었다. 스물한살 때인 1969년 병역기피죄로 10개월 형을 받으며 시작된 정춘국의 고난은 그의 나이 서른셋, 박정희가 죽고 2년이 흐른 뒤에야 끝이 났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사람인지라 젊은 나이에 또다시 징역살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는 다시 영장이 나올 것을 알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무당국은 신심이 좋은 이들이 집에는 안 들어와도 예배에는 나올 것으로 보고 왕국회관 등을 습격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집회뿐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끌려갔다. 징역을 살고 나온 정춘국은 교도소 앞에서 다시 끌려갔고, 결혼식장에서 곧바로 잡혀간 새신랑도 있었다.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에 부합하여 기피율 제로를 꿈꾸던 병무청은 불법적인 강제연행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들을 군대로 끌고 갔다. 이제 병역기피율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징병 연령대에 해당하는 남성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국가의 강력한 단속에 아랑곳없이 양심의 명령에 따랐다. 이들은 민간인으로 병역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군대로 끌려와 항명죄를 저지른 것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의 최일선에는 병무청이 아니라 군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 결과는 김종식(1975년 11월13일), 이춘길(1976년 3월19일) 등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이 군대에서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군대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만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유신 시절,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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